원리강론



총 서

1장 창 조 원 리

2장 타 락 론

3장 인류역사 종말론

4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5장 부활론

6장 예정론

7장 기 독 론


원리강론Pt2



서 론

1장 복귀기대섭리시대

2장 모세와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3장 섭리 역사의 각 시대와 그 연수의 형성

4장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연장시대

5장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

6장 재 림 론

























총 서


행복은 어떻게 해서 오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의(本意)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그 욕망이 선()보다도 악()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不意)를 맺는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심(本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심은 이러한 욕망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악을 지향하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어두움을 헤치고 생명의 빛을 찾아 고달픈 길을 더듬고 있는 인생이다. 불의의 욕망을 따라가서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누려본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욕망을 채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게 된다. 자식에게 악을 가르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제자에게 옳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어디 있을 것인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심의 발로이다.

특히 이러한 본심(本 心)이 지향하는 욕망을 따라 선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도인(道人)들의 생활 있지만, 유사이래 그 본심대로만 살다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로마서 310 - 11)라고 하였으며, 또 인간의 이러한 참경(慘境)에 직면하였던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22 - 24)라고 개탄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 리는 여기에서 선한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것과는 반대로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심(邪心)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서로 다른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간의 모순성(矛盾性)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안에 모순성을 갖게 될때에는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된 인간 자체는 바로 파멸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어 떠한 존재도 모순성을 내포하고서 생성(生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지닌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상태를 일컬어 기독교에서는 타락(墮落)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누구도 이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 간은 이와 같이 타락되어 자기 파멸에 이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따라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의 모순성을 제거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궁극(窮極)에 있어서 선과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을 두고 볼 때 그 중의 어느 하나가 선이라고 하면 다른 하나는 악이 도리 것인데, 우리는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절대적인 정설(定說)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인간들은 선의 욕망을 일으키는 본심이 무엇이고 이 본심을 거슬러 악의 욕망을 일으키는 악한 마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성을 갖게 하여 파멸을 초래케 한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 등의 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선의 욕망을 따라 본심이 지향하는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하려는 이 무지(無知)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선악(善惡)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內外) 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 있어서도 내 외 양면의 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후(死後)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내세(來世)와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 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물질 세계의 근본은 무엇이며 그 모든 현상은 각각 어떠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인간은 유사이래(有史以來) 오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무지(無知)에서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진리를 찾아 나왔다. 그리하여 내적인 무지에서 내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종교(宗敎), 외적인 무지에서 외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외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과학(科學)이다. 이와 같이 알고 보면 종 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로부터 양면의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양면의 진리를 찾아 나온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무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가지고 본심의 욕망이 지향하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하려는,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 내 외 양면의 진리가 상통하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의 실제에 있어서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을 두 가지로 대별(大別)햐여 본다면, 첫째는 물질로 된 이 결과의 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길이다. 이 러한 길을 지상(至上)으로 생각하고 걸어온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된 과학 앞에 굴복하여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러한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과학의 발달이 아무리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루고 그 속에서 아무리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린다 한들 그것으로써 어찌 속 사람의 정신적인 욕구까지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육신의 낙()을 즐기는 속인(俗人)의 기쁨은 청빈(淸貧)을 즐기는 도인(道人)의 기쁨에 미칠 수 없으리라.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는 구도(求道)의 행각을 즐긴 것은 비단 석가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 마음이 있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기쁨에 있어서도 마음의 기쁨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몸의 기쁨도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낙을 찾아 과학의 돛을 달고 물질세계를 항해하는 사공이 있는가? 그가 이상(理想) 하는 그 언덕에 닿아 보라. 그 곳이 바로 육신을 묻어야 할 뫼인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면 이제 과학(科 學)의 갈 곳은 어디일 것인가? 지금까지의 과학의 연구 대상은 내적인 원인의 세계가 아니고 외적인 결과의 세계였으며, 본질(本質)의 세계가 아니고 현상(現象)의 세계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의 대상은 외적이며 또한 결과적인 현상의 세계에서, 내적이며 또한 원인 적인 본질의 세계에로 그 차원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그 원인적인 심령세계(心靈世界)에 대한 논리 즉 내적 진리가 없이는, 결과적인 실체세계(實體世界)에 대한 과학 즉 외적 진리도 그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제 과학의 돛을 달고 외적인 진리의 항해를 마친 사공이, 또 하나의 종교의 돛을 달고 내적인 진리의 항로에로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그는 본심이 지향하는 이상향(理想鄕)에로 항행(航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의 그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現象世界)를 초월하여 원인적인 본질세계(本質世界)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밟아 온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철인(哲人)들과 성현(聖賢)들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려고 각각 그 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인 개척의 길로 나섰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모두 오늘의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이제 다시 냉철히 생각해 보자. 어 느 철인이 우리의 고민을 풀어 주었으며, 어느 성현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우리의 갈 길을 뚜렷이 보여 주었던가? 그들이 제시한 주의(主義)와 사상(思想)이란 것은 도리어 우리들이 해결하고 가야 할 잡다한 회의(懷疑)와 수많은 과제들을 제기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 시대의 많은 심령(心靈)들에게 비쳐 주던 소생(蘇生)의 빛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어느덧 꺼져버리, 이제는 타다 남은 희미한 불똥만이 그들이 잔해를 드러내고 있다.

온 인류의 구원(救 援)을 표방하고 2천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게 된 기독교(基督敎)의 역사를 들추어 보라. 로마제국의 그 잔학무도(殘虐無道)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힘찬 생명의 불길을 던져, 로마인들로 하여금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던 기독정신(基督精神)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이윽고 중세 봉건사회(中世封建社會)는 기독교를 산 채로 매장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무덤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절규하는 종교개혁(宗敎改革)의 봉화는 들렸었으나, 이 불길도 격동하는 어둠의 물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에클레시아(ecclesia)의 사랑이 꺼지고 자본주의의 재욕(財慾)의 바람이 유럽의 기독사회를 휩쓸어, 기아(饑餓)에 허덕이는 수많은 서민들이 빈민굴에서 아우성을 칠 때, 그들에 대한 구원의 함성은 하늘이 아닌 땅으로부터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共産主義).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짖고 나선, 기독교가 그 구호만을 남긴 에클레시아의 잔해로 돌아갔을 때, 거기서 그렇게 무자비한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반기가 들렸던 사실은 있을 만하기도 하다.

이렇게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유물사상(唯物思想)이다. 그리하여 기 독교 사회는 유물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공산주의는 이 온상에서 좋은 거름을 흡수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저들의 실천을 능가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저들의 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를 제시하지 못한 기독교는 저들이 바로 자기의 품 속에서 싹트고 자라서 그 판도를 세계적으로 넓혀 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束手無策), 이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온 인류가 한 부모의 후예(後裔)임을 교리로써 가르치고 또 그와 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 국가의 바로 그 국민들이, 다만 피부의 빛깔이 다름을 인하여 그 형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게 된 현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실천력을 잃어버리고 회칠한 무덤 같이 형식화해 버린 현하(現下) 기독교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비극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는 끝날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 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사회악(社會惡)이 또 있다. 음란(淫亂)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는 이것을 죄 중의 가장 큰 죄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기독교사회가 현세인 들이 몰려가는 이 윤락(淪落)의 길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눈물겨운 실정인가?

이와 같이 오늘의 기독교(基督敎)가 이러한 세대의 흐름 가운데서 혼돈 되고 분열되어, 패륜(悖倫)의 와중(渦中)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생명들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바로 종래의 기독교가 현대인류에 대한 구원섭리(救援攝理)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사실을 뚜렷이 증명하는 것이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오던 종교인(宗 敎人)들이, 오늘에 이르러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본질세계(本質世界)에 현상세계(現象世界)와의 관계는 비유건대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아서, 원인 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그리고 주체적인 것과 대상 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마치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합해야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질과 현상의 두 세계가 완전히 합치되어야만 이상세계(理想世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마음과 몸이 그러하듯이, 본질세계를 떠난 현상세계가 있을 수 없고, 현상세계를 떠난 본질세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現實)을 떠난 내세(來世)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육신의 행복이 없이 심령적(心靈的)인 기쁨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宗敎)는 내세를 찾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기에 필사적이었으며, 심령적인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행복을 멸시하기에 몸부림쳐 왔다. 그 러나 끊어버리려야 끊어버릴 수 없는 현실과, 떼어 버리려야 떼어 버릴 수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육신의 행복욕(幸福慾), 끈덕지게 도인(道人)들을 붙들어 오뇌(懊惱)의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인들의 도()의 생활에도 이러한 모순성이 있는 바로 오늘의 종교인들의 생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가당착(自家撞着)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 현대의 종교가 무위화(無爲化)한 주요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제 종교가 이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지성(知性)이 최고로 계발(啓發)된 나머지, 현대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종교의 교리에는 그런 과학적인 해명이 전적으로 결여(缺如)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진리가 서로 일치된 해명을 가지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종교(宗 敎)의 궁극적인 목적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앎이 없이는 생길 수 없다. 우리가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진리를 알아서 믿음을 세우기 위함이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행하심도 그가 메시아 됨을 알려서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곧 인식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 간은 논리적이며 실증적인 것 즉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인식할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종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적인 진리에도 논증적인 해명이 필요하게 되어, 종교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하여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시대를 추구해 나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無 知)를 타개하기 위한 사명을 각각 분담하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상충하여 서로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상(樣相)을 보여 왔으며, 인간이 그 양면의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본심이 요구하는 선()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자면, 어느 때든지 과학을 찾아 나온 종교와 종교를 찾아 나온 과학의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주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새 진리(眞 理)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서가 이미 그것만으로써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유일(唯一)하고 영원불변(永遠不變)하며 절대적(絶對的)이다. 그러나 경서란 진리 자체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과서로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로 그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져 온 각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를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교과서 마저 절대시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그 본심(本心)의 지향성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방편으로 나오게 된 것이 종교(宗敎)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목적은 동일한 것에 있는 것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분야와 그를 대하는 민족에 따라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와 같은 이유로 그 경서를 서로 달리하게 되는 데서 필연적으로 각양각이(各樣各異)의 종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서란 진리의 빛을 밝혀 주는 등잔과 같아서 주위를 밝힌다는 사명은 같지만, 보다 밝은 등불이 나올 때는 그것으로써 낡은 등잔의 사명은 끝나는 것이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오늘의 어떠한 종교도 현대인(現世人) 들을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생명의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새 빛을 발하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실 것은 성서(聖書) 가운데에도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편 제3장 제5절 참조)

 

그러면 그 새 진리(眞理)는 어떤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인가? 이 진리는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 종교가 찾아 나온 내적인 진리와 과학이 찾아 나온 외적인 진리를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내 외 양면의 무지(無知)에서 내 외 양면의 지()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사심(邪心)이 지향하는 그 악의 길을 막고 본심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 선의 목적을 이루게 함으로써 선악(善惡) 양면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과 위에서 이미 논한 바 종교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도()의 생활의 모순성을 극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타락인간에 있어 ''은 생명의 빛이요 또한 소생의 힘이 된다. 그리고 무지는 사망의 그늘이요 또한 파멸의 요소인 것이다. 무지에서는 어떠한 정서(情緖)도 일어날 수 없으며, 무지와 무정서(無情緖)에서는 어떠한 의지(意志)도 생길 수 없다.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 지()- ()- ()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될 때에는, 거기에 인간다운 인간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實在性)에 대하여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心情)에 대해 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유구(悠久)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救援)하시려고 애써오신 애달픈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선과 악의 두 면을 지향하는 인간들의 상충적인 생활로써 형성되어 온 인류 역사는 거의 싸움으로 엮어져 내려왔다. 그 싸움은 바로 재물 빼앗기 싸움, 땅 빼앗기 싸움, 그리고 사람 빼앗기 싸움 등의 외적인 싸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민족이 없이 한데 모여 한 국가를 이루고, 이제는 도리어 전승국가(戰勝國家)들이 식민지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열강(列强)들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여 유엔의 회원국가가 되게 함으로써, 함께 세계정부(世界政府)의 실현을 도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국제관계가 하나의 경제문제를 중심하고 완화되어, 더불어 하나의 공동시장체제를 형성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오늘날 문화면에서는, 각 민족의 전통적인 이질성(理質性)을 극복하고 동서양(東西洋)의 거리를 초월하여,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서로 유통(流通)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릇이 바로 민주주의(民 主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와의 내적인 이념(理念)의 싸움이다. 그들은 서로 무서운 무기를 마련하고 외적인 싸움을 겨루고 있으나, 그 실은 내적인 이념의 싸움의 판가리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최종적인 이념의 싸움에 누가 승리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오늘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를 굴복시킬 수 있는 아무런 이론도 실천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 援攝理)가 완전히 이루어지려면 바로 이 새 진리가 지금까지 민주주의세계에서 주창해 온 유심론(唯心論)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 유물론(唯物論)을 흡수함으로써, 온 인류를 새 세계에로 옮겨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진리는 역사 이래의 모든 주의나 사상은 물론, 모든 종교까지도 하나의 길로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종교를 믿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實 在)와 내세(來世)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적(靈的)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만 한다면 믿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本性)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에다 인생의 궁극의 목적을 세우고 나아가는 그 누구도 마침내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천성(天性)의 발로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적인 사실에 부딪쳐서 인생의 근본 목적을 현실세계에다 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다 두고 가야 할 것임을 깨달을 때에는, 누구나 이 한 길을 통하여 하나의 목적지에서 하나의 형제로서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온 인류가 하나의 진리(眞理)에 의하여 하나의 형제로서 하나의 목적지에서 만나게 된다면, 거기에서 이룩된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 것인가? 이 세계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인생의 양면의 무지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쳐 온 인간들이, 그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함께 만나 가지고 하나의 대가족(大家族)을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진리의 목적이 선을 찾아 이루려는 데 있고, 선의 본체가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그 진리에 의하여 도달된 이 세계는 바로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서로 형제애(兄弟愛)에 얽혀 사는 세계인 것이다. 자 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웃을 희생시킬 때에 느껴지는 불의(不義)한 만족감보다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오는 고통의 도()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는, 결코 그 이웃을 해칠 수 없게 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형제애가 솟구칠 때, 도저히 그 이웃에 고통을 끼치는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부모가 되시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그 사회의 인간에 있어 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가 인류 죄악 사를 청산한 새 역사의 시대에서 이루어 놓은 새 세계는,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성도(聖 徒)들이 범죄를 하게 되었던 것은 실상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어디까지나 관념적이요, 실감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성(存在性)을 실감하는 자리에서 범죄한 인간은 부득이 지옥(地獄)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는 천법(天法)을 안다면, 거기에서 누가 감히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죄 없는 세계를 천국(天國)이라 할진대,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찾아 나온 이 세계야말로 바로 그 천국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은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궁극적인 목적이 지상천국을 이루시려는 데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위에서, 인간이 타락(墮落)되었다는 사실과 이 타락은 인간이 생긴 이후에 되어진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거니와, 이제 하나님의 실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인간시조가 타락하기 이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이루려 하셨던 그 세계가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데 대한 답은 너무도 자명(自明)하다. 그에 관해서는 전편 제3장에서 논하겠거니와, 그 세계야말로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이루어진 지상천국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죄악세계(罪惡世界)를 이루어 무지에 떨어졌었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내 외 양면의 진리를 더듬어, 이 무지를 타개하면서 선()을 지향하여 분단히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세계인 지상천국을 되찾아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復歸)하여 나아가는 섭리역사(攝理歷史)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새 진리는 타락인간을 그 창조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복귀과정(復歸過程)에 있는 타락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야 된다.

 

그리고 인간은 과연 성서(聖 書)가 말하는 문자 그대로, 선악과(善惡果)라는 과실을 따먹고 타락(墮落)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타락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또 완전완미(完全完美) 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타락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을 창조(創造)하셨고 ,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그 들이 타락되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왜 그 창조의 권능을 가지고 일시에 죄악인간을 구원(救援)하지 못하시는가 하는 것 등, 실로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혀 온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 15

우리가 피조세계(被 造世界)에 비장(秘藏)되어 있는 과학성을 살펴볼 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야말로 과학의 근본이기도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의 역사임이 사실일진데, 그와 같이 모든 법도(法度)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처럼 오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기간을 두시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질서하게 이 역사를 섭리해 나오셨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악역사가 어떻게 출발하여, 어떠한 공식적인 섭리의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모양으로 종결되어, 어떠한 세계에로 들어갈 것인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긴절(緊切)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이러한 근본문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명백하게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명확하게 풀려지게 될 때, 우리는 역사를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어떠한 주체, 곧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더욱 부인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역사적인 사실들이, 바로 타락인간(墮落人間)을 구원하여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새 진리는 오늘날 문화권(文 化圈) 형성의 세계적인 사명을 띠고 있는 기독교의 많은 난해(難解)한 문제들을 명백히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지성인들은 누구나 단순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의 구주(求主)라는 정도의 지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뜻을 체득(體得)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신학계(神學界)에서는 많은 논쟁을 벌여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과의 창조 원리적인 관계를 밝혀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 않게 어려운 문제로 되어 있는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해명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救援)은 어찌하여 그 독생자(獨生子)로 하여금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셔서만 가능하였던가 하는 것도 응당 풀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代 贖)으로 인하여 분명히 구속(救贖)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이래 어느 한 사람도 구주의 속죄(贖罪)가 필요없이 천국 갈 수 있는 죄없는 자녀를 낳아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중생(重生)한 후에도 여전히 원죄를 그 자녀들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닐 것인가?이러한 실증적인 사실로 보아, 십자가 대속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 예수 이후 2천년 기독교 역사의 기간을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피로써 완전히 사죄(赦罪)함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신도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죄 없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를 이루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날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기독정신(基督精神)은 점점 쇠미(衰微)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 온 바 십자가 대속(代贖)의 완전 속죄(贖罪), 그 결과적 사실의 불일치(不一致)에서 초래되는 모순은 무엇으로써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 하는 등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고 있는 난문제(難問題)들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대하고 있는 새 진리는 이에 대한 해답도 명백히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진리는 예수님이 왜 재림(再 臨)하셔야 하며, 또 그의 재림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과, 그때에 타락인간의 부활(復活)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서 하늘 땅이 불에 소멸되어 없어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 등, 상 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성서의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이미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사(比辭)로써가 아니고 누구나 공통하게 알 수 있도록 밝히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요한복음 1625). 이러한 진리(眞理)로써만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는 성구(聖句)를 저마다 각양각이하게 해석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교파 분열의 필연성을 지양(止揚)하고, 그것들을 통일할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이 최종적인 진리는 어떠한 경서(經書)나 문헌에 의한 종합적인 연구의 결과로나, 혹은 어떠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성서(聖書)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요한계시록 1011)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啓示)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분을 보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문 선명 선생(文鮮明 先生)이시다. 이 분은 수십 성상(星霜)을 두고 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창망(蒼茫)한 그 무형세계(無形世界)를 헤매시면서 하늘만이 기억하시는 진리 탐구의 피어린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인간으로 걸어야 할 최대의 시련의 길을 다 걷지 않고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종적인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원리를 아셨기에 선생은 혈혈단신(孑 孑單身)으로 영계(靈界)와 육계(肉桂)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樂園)의 수많은 성현(聖賢)들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교(靈交)하는 가운데서 모든 천륜(天倫)의 비밀을 밝혀내신 것이다.

여기에 발표된 말씀은 바로 그 진리(眞理)의 일부로서, 이것은 지금까지 그의 제자들이 듣고 본 범위의 것을 수록한 데 불과한 것이다. 때가 이르는 데로 더 깊은 진리의 부분이 계속 발표될 것으로 믿고 또 고대하는 바이다.

어둠길을 헤매던 수많은 생명들이 세계의 도처에서 이 새로운 진리의 빛을 받아 소생(蘇生)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어서 속히 이 빛이 온 누리에 가득 차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1장 창 조 원 리



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인생과 우주에 관한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하여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하여 석연(釋然)한 대답을 해 준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은 본래 인간이나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구체적인 구극(究極)의 원리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보다 더 근본된 선결문제(先決問題)가 남아 있다. 그것은 결과적인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원인적인 존재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과 우주에 관한 문제는 결국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으로 계시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서는 풀리지 않는 것이다. 창조원리(創造原理)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광범하게 다루고 있다.

1 절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피조세계

. 하나님의 이성성상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피조세계(被造世界)를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로 마서 120)고 기록하였다. 마치 모든 작품은 그 작자의 보이지 않는 성품의 실체적인 전개인 것 같이, 피조세계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그의 실체대상으로 전개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보아 그 작자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것 같이, 이 피조만물(被造萬物)을 보아서 하나님의 신성을 알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알기 위하여,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보편적으로 간직되어 있는 공통사실을 찾아 보기로 하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사이에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 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이에 대한 실례를 들어 보면, 모든 물질의 궁극적인 구성요소인 소립자(素粒子)들은 모두 양성 음성 또는 양성과 음성의 중화에 의한 중성(中性) 등을띠고 있는데, 이것들이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원자(原子)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자들도 양성 또는 음성을 띠게 되는데, 이것들의 이성성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물질의 분자(分子)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물질들이 또한 서로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식물 또는 동물에 흡수됨으로써 그것들의 영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식물은 각각 수술과 암술에 의하여 존속하고, 또 모든 동물은 각각 수컷과 암컷에 의하여 번식 생존한다. 인간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남성인 아담을 창조하시고는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창세기218) 그의 대상으로 여성인 해와를 창조하신 후에야 선하다고 하셨다(창세기 131).

그리고 전리(電離)된 양이온이나 음이온도 또한 각각 양자(陽子)와 전자(電子)의 결합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과 같이, 수술이나 암술 또는 수컷이나 암컷들도 역시 각각 그 자체 내에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있어서도 남성에는 여성성상(女性性相), 여성에는 남성성상(男性性相) 이 각각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삼 라만상의 존재하는 모양이 표리(表裏), 내외(內外), 전후(前後), 좌우(左右), 상하(上下), 고저(高低), 강약(强弱), 억양(抑揚), 장단(長短), 광협(廣狹), 동서(東西), 남북(南北) 등과 같이 모두 상대적으로 되어 있는 것도 모든 피조물이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서로 존재하도록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서 모든 존재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으로 인한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아가 우리는 모든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보다 근본된 또 하나의 이성성상의 상대적인 관계를 알아야 하겠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외형(外形)과 내성(內性)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 보이는 외형은 보이지 않는 그 내성을 닮아 난 것이다. 따라서 그 내성이 눈에는 보이지는 않으나 반드시 그 어떠한 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 난 그 외형이 눈에 보이는 그 어떠한 꼴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전자을 성상(性相)이라 하고 후자를 형상(形狀)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상과 형상은 동일한 존재의 상대적인 양면의 꼴을 말하는 것이어서, 형상은 제2의 성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틀어서 이성성상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예로서 인간을 들어 보기로 하자. 인간은 몸이란 외형과 마음이란 내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나타나 보이는 몸은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을 닮아 난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어떠한 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닮아 난 몸도 어떠한 꼴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관상(觀相)이나 수상(手相) 외모로써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과 운명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이에 마음을 성상(性相)이라 하고 몸을 형상(形狀)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마음과 몸은 동일한 인간의 상대적인 양면의 꼴을 말하는 것이어서, 몸은 제2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틀어서 이성성상(二性性相)이라고 한다. 이로써 우리는 모든 존재가 성상과 형상에 의한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성상과 형상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무형(無形)의 내적인 성상이 원인이 되어 그것이 주체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의 형상은 유형(有形)의 외적인 결과가 되어 그의 대상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 종적인 것과 횡적인 것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다시 인간을 들어 보자. 마음과 몸은 각각 성상과 형상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몸은 마음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명령하는대로 동()하고 정()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목적을 지향하여 생()을 유지한다. 따라서 마음과 몸은 내() (), 원인(原因)과 결과(結果), 주체(主體)와 대상(對象), ()과 횡() 등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떠한 피조물(被 造物)에도 그 차원은 서로 다르나, 무형의 성상 즉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같은 무형의 내적인 성상이 있어서 그것이 원인 또는주체가 되어 인간에 있어서의 몸과 같은 그의 형상적인 부분을 움직여서, 그 개성체(個性體)로 하여금 어떠한 목적을 가진 피조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에게도 인간의 마음과 같은 것이 있어서 이것이 어떠한 목적을 지향하는 주체적인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육체는 그 개체의 목적을 위한 생()을 영위하게 된다. 식물에도 역시 그러한 성상적인 부분이 있어서, 그것이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 개체는 유기적인 기능을 유지하게 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서로 결합하게 되는 것은 그들 속에 각기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과 같이, 양이온과 음이온이 결합하여서 어떠한 물질을 형성하는 것도 이 두 이온들 속에 각각 그 분자(分子) 형성의 목적을 지향하는 어떠한 성상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陽子)를 중심하고 전자(電子)가 회전하여 원자(原子)를 형성하는 것도 역시 그것들 속에 각각 그 원자 형성의 목적을 지향하는 성상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의 과학에 의하면,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는 모두 에너지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에너지가 소립자(素粒子)를 형성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그 에너지에도 그로 하여금 소립자 형성의 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성상적인 부분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와 같이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갖추고 있는 그 에너지를 존재케 함으로써 모든 존재계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한 존재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존재는 바로 모든 존재의 1원인으로서, 그 모든 것들의 주체적인 성상과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계의 이러한 제1원인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주체적인 성상과 형상을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제 바울이 논증한 바와 같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공통적으로 간직되어 있는 사실들을 추궁(追窮)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中和的 主體)로서 모든 존재계의 제1원인으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 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의 제1원인 되신 존재인 하나님도 역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해야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창세기 1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 보아서도 하나님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도 계시다는 것을 바로 알 수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이성성상과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본래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은 각각 본양성과 본음성의 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양성과 본음성은 각각 본성상과 본형상의 속성(屬性)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성과 음성은 각각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양성과 음성은 내 외,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 또는 종과 횡 등의 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남성인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그의 대상으로서 여성인 해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 222).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에 있어서의 양성과 음성은 각각 남성과 여성이라고 칭한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성된 피조세계(被 造世界)는 마치 마음을 중심하고 완성한 인간 하나와 같아서,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有機體)인 것이다. 따라서 이 유기체도 성상과 형상을 갖추어야 할 것이니 그의 성상적인 존재가 하나님이시요, 그 형상적인 존재가 피조세계인 것이다. 하나님이 피조세계의 중심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창세기 127) 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男 性格 主體)로만 계셨기 때문에, 형상적인 여성격 대상으로 피조세계를 창조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117절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성구는 바로 이러한 원리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아버지라 불러 그 격위(格位)를 표시하는 것이다.

상술(上述)한 내용을 요약하여 볼 때,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中和的 主體)인 동시에, 본성상적 남성(男性)과 본형상적 여성(女性)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계시며, 피조세계에 대하여는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로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하나님과 피조세계와의 관계

위에서 논술한 바에 의하여, 피조물은 모두 무형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실체로 분립된 하나님의 실체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이러한 실체대상을 우리는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적인실체대상이기 때문에 형상적 개성진리체라 하고,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은 상징적인 실체대상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상징적 개성진리체라고 한다.

개성진리체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실체로 분립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상적 남성을 닮은 양성(陽性)의 실체와 그의 본형상적 여성을 닮은 음성(陰性)의 실체로 분립된다.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이 분립된 개성진리체는 모두 하나님의 실체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각기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아서 그 자체 내에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을 갖추게 되며, 그에 따라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을 함께 갖추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성성상(二性性相)을 중심하고 본 하나님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요약하면, 피조세계는 무형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창조원리에 의하여 상징적 또는 형상적인 실체로 분립된 개성진리체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실체대상이다. 즉 만물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상징적인 실체로 분립된 실체대상이요, 인간은 그것이 형상적인 실체로 분립된 실체대상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세계는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같아서 내 외,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 종과 횡 등 이성성상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입각하여 동양철학(東洋哲學)의 중심인 역학(易學)의 근본을 알아보기로 하자.

역학에서는 우주의 근본은 태극(太 極, 無極)이며, 그 태극에서 음양(陰陽), 음양에서 금() () () () ()의 오행(五行), 그리고 오행에서 만물이 생성되었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음양을 `()'라 이르고(一陰一陽之謂道), `'는 곧 `말씀'(道也者言也)이라고 하였다. 이 내용을 종합하면 태극에서 음양 곧 말씀이 나왔고, 이 말씀에서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태극은 모든 존재의 제1원인으로서 음양의 통일적 핵심이며 그 중화적 주체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을 요한복음 11 내지 3에 기록된 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이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한 그 내용과 대조해 보면, 음양의 중화적인 주체인 그 태극(太極)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이신 하나님을 표시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창조원리(創造原理)로 보더라도 말씀이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도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음양이 곧 `말씀'이라고 한 역학(易學)의 주장은 타당한 것이다. 그 러나 역학은 다만 음양을 중심하고 존재계를 관찰함으로써 그것들이 모두 성상과 형상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에, 태극이 음양의 중화적 주체인 것만을 밝혔을 뿐 그것이 본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에 의한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 태극이 인격적인 신()이시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역학에 의한 동양철학의 근본도 결국 창조원리에 의하여서만 해명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근래에 한의학이 점차 그권위를 더해 가게 되는 것도, 그것이 음양을 중심으로 한 창조원리적 근거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절 만유원력과 수수작용 및 사위기대

 

.만유원력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조주(創 造主)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는 절대자(絶對者)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존재로 계시기 위한 근본적인 힘도 영원히 자존하는 절대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또 피조물이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을 발생케 하는 힘의 근본이기도 하다. 이러한 힘의 근본된 힘을 우리는 만유원력(萬有原力)이라고 한다.

 

.수수작용

 

모든 존재를 이루고 있는 주체(主 體)와 대상(對象)이 만유원력에 의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잘 주고 잘 받으면, 여기에서 그 존재를 위한 모든 힘, 즉 생존과 번식과 작용 등을 위한 힘을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힘을 발생케하는 작용을 수수작용(授受作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 유원력과 수수작용의 힘은 각각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으로서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만유원력은 종적(縱的)인 힘이요, 수수작용의 힘은 횡적(橫的)인 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만유원력과 수수작용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피조물에 관한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 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그 자체 내에 영존(永存)하는 이성성상(二性性相)을 가지고 계셔서, 이것들이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이루어 영원한 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이 수수작용의 힘에 의하여 그 이성성상은 영원한 상대기대(相對基臺)를 조성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존재기대 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은 영존하시며, 또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기 위한 모든 힘을 발휘하시게 되는 것이다.

한편 피조물(被造物)에 있어서도,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이성성상(二性性相)이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이루어 가지고 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수수 작용의 힘에 의하여 그 2(二性)은 상대기대(相對基臺)를 조성하여 그 개성체(個性體)의 존재기대(存在基臺)를 이룸으로써, 비로소 그 개성체는 하나님의 대상으로 서게 되며, 또 스스로가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도 발휘하게 된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양자(陽子)와 전자(電子)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원자(原子)가 존재하게 되고, 그의 융합작용 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양() () 두 이온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분자(分子)가 존재하게 되며, 또 화학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한편 양전(陽電)과 음전(陰電)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전기가 발생되며,모든 전기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식물에 있어서도 도관(導 管)과 사관(篩管)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식물체의 기능이 유지되며, 그의 유기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암술과 수술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번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동물도 수컷과 암컷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그의 생()을 유지하며 또한 번식 한다. 그리고 동식물간에 있어서도 산소와 탄산가스의 교환, 벌과 꽃의 수수작용 등에 의하여 그들은 공존(共存)하고 있다.

천체(天 體)를 보아도 태양과 혹성(惑星)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태양계(太陽系)가 존재하면서 우주형성을 위한 운행을 하고 있으며, 또 지구와 달도 서로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일정한 궤도를 유지하면서 공전(公轉)과 자전(自轉)의 운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동맥과 정맥, 호흡작용,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등의 수수작용으로써 그 생을 유지하고 있고, 그 개성체는 몸과 마음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존재하면서 그의 목적을 위한 활동을 한다.

그리고 가정에 있어서는 남편과 아내가, 사회에 있어서는 인간과 인간이, 그리고 국가에 있어서는 정부와 백성이, 더 나아가서 세계에 있어서는 국가와 국가가 서로 수수작용을 하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른 것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그 양심(良心)의 힘만은 뚜렷이 그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힘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으로서, 자기도 모르게 강력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악을 행할 때에는 즉각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타락인간에게 이러한 양심의 작용이 없다면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양심작용(良心作用)의 힘은 어떻게 되어 생기는 것인가? 모든 힘이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서만 생기는 것이라면, 양심도 역시 독자적으로 그 작용의 힘을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양심도 어떠한 주체에 대한 대상으로 서서 그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양심의 주체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타락(墮 落)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수수(授受)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서로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사탄과 수수의 관계를 맺어 그와 일체를 이루게 된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어 일체를 이룬 오직 한 분의 독생자로 오셨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그와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어 일체를 이루게 되면 창조본성을 복귀하여 하나님과도 수수작용을 하게 됨으로써 그와 일체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타락인간의 중보(仲保)가 되는 동시에 길이 되고 진리가 되며 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생명을 바쳐 사랑과 희생으로 모든 것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앞에 믿음을 돌려 드리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한복음 316).

기독교(基 督敎)는 사랑과 희생에 의하여 예수님을 중심하고 인간 사이의 횡적인 수수의 회로를 회복함으로써,하나님과의 종적인 수수(授受)의 회로(廻路)를 복귀시키려고 하는 사랑의 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72)라고 말씀하셨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고도 하셨으며,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태복음 1032)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1041)라고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42)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삼대상목적을 이룬 사위기대

 

1. 정분합작용

 

만유원력(萬 有原力)으로 인하여 하나님 자체 안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수수작용의 힘은 번식작용을 일으키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이성성상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다. 이와 같이 분립된 주체와 대상이 다시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써 수수작용을 하면, 이것들은 다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여 하나님의 또 하나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정()으로 하여 그로부터 분립(分立)되었다가 다시 합성일체화하는 작용을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고 한다.

 

2. 삼대상목적

 

이와 같이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정() 을 중심하고 2(二性)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와 대상과 그리고 그의 합성체(合性體)가 제각기 주체의 입장을 취할 때에는 각각 나머지 다른 것들을 대상으로 세워 삼대상기준(三對象基準)을 조성한다. 그래 가지고 그것들이 서로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여기에서 그 주체들을 중심으로 각각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3. 사위기대

 

이와 같이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정()을 중심하고 2성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와 대상과 그리고 그의 합성체가 각각 삼대상목적을 완성하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하게 된다.

사위기대는 4수의 근본이며, 또 그것은 삼대상목적을 완성한 결과이므로 3수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 위기대는 정분합작용에 의한 하나님, 부부, 자녀의 3단계로써 완성되므로 3단계 원칙의 근본이 된다.사위기대는 그의 각 위()를 중심하고 각각 3대상이 되므로 이것들을 총합하면 12대상이 되기 때문에 12수의 근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 사위기대는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선()의 근본적인 기대이므로,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모든 존재와 또 그것들이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의 근본적인 기대가 된다. 따라서 사위기대는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목적이 되는 것이다.

 

4. 사위기대의 존재양상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삼대상목적을 이루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완성한 존재는 무엇이든지 원형(圓形) 또는 구형운동(球形運動)을 하여 입체로 존재한다.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각각 그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에 있어서, 그 대상이 주체에 대응하여 상대기준을 조성하면 그 대상은 주체를 중심하고 서로 주는 힘(遠心力)과 받는힘(求心力)으로써 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주 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대상은 주체를 중심하고 돌아서 원형운동(圓形運動)을 하게 됨으로써 합성일체화한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그 주체는 하나님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아서 그와 합성일체화하고, 또 그 대상이 그러한 주체와 합성일체화하게 될 때, 비로소 그 합성체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실체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그 대상은 그의 주체와 합성일체화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체대상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도 역시 각각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도 똑같은 수수작용의 원리에 의하여 제각기 원형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체대상은 이와 같이 제각기 끊임없는 운동을 하고 있는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원형운동을 하기 때문에 그 원형운동은 이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그 주체와 대상 자체들의 특수한 운동양상에 따라서는 동일한 평면상의 궤도에서만 일어날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는 그 주체를 중심하고 부단히 그 원형운동 궤도의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원형운동은 드디어 구형운동(球形運動)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위기대를 완성한 존재는 모두 원형또는 구형운동을 하게 되어 그 존재하는 모양은 입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태양계(太陽系)를 들어 보기로 하자. 태양을 주체로 한 모든 유성(遊星)들은 태양의 대상이 되어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써 태양을 중심하고 그에 대응하여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한 수수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공전(公轉)의 원형운동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되어 원형운동을 하는 태양과 유성들은 합성일체화하여 태양계를 이룬다.그런데 이성성상의 복합체인 지구가 자전(自轉)하고 있을 뿐 아니라, 태양이나 태양을 중심한 다른 유성들도 또한 이성성상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부단히 자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자전하고 있는 태양과 유성들의 수수작용에 의한 태양계의 원형운동은 항상 똑같은 평면상의 궤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하고 부단히 그 궤도의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태양계는 구형운동을 하게 되어 입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와 같이 되어 모든 천체(天體)는 원형 또는 구형운동에 의하여 입체로써 존재하며, 이와 같은 무수한 천체들이 서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하여 이루어지는 우주(宇宙)도 역시 똑같은 원리에 의하여 구형운동을 하게 됨으로써 입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원자(原 子)를 형성하고 있는 전자(電子)가 양자(陽子)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양자를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것들은 원형운동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하여 원자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양자와 전자도 각각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어서 제각기 부단한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양자와 전자의 수수작용에 의한 원형운동도 역시 똑같은 평면상의 궤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중심하고 부단히 그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운동은 드디어 구형운동으로 화하게 된다. 원자 역시 이렇듯 구형운동을 함으로써 입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전기에 의하여 양과 음 두 극에 나타나는 자력선(磁力線)도 똑같은 원리에 의하여 구형운동을 하게 된다.

다시 이러한 예를 인간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하자. 몸은 마음의 대상으로서 마음과 상대 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게 되면, 몸은 마음을 중심하고 원형운동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다. 그런데 마음이 하나님의 대상이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아서 그와 합성일체화 하고 몸이 이러한 마음과 합성일체화하게 되면, 그 개체는 비로소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닮은 실체대상이 되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도 각각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어서 그 자체들도 제각기 부단한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몸과 마음의 수수작용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원형운동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끊임없이 그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게 되어, 구형운동으로 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창조 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언제나 구형운동의 생활을 하는 입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무형세계(無形世界)까지도 주관하게 되는 것이다.(본장 제 6 절 참조)

이와 같이 주체와 대상이 주고 받는 평면적인 회로에 의한 원형운동이 다시 입체적인 회로에 의한 구형운동으로 화하는데서 창조의 조화는 벌어지는것이다. 즉 그 회로의 거리와 모양과 상태와 방향과 각도와 그리고 그들이 각각 주고 받는 힘의 속도 등의 차이에 의하여 천태만상의 조화의 미()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성상(性 相)과 형상(形狀)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구형운동(球形運動)에도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의 중심에도 성상적인 중심과 형상적인 중심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자(前者)와 후자(後者)는 성상과 형상의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구형운동의 궁극적인 중심은 무엇일 것인가? 하나님의 이성성상의 상징적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의 중심은 인간이고, 그의 형상적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므로, 피조세계의 구형운동의 궁극적인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제 이에 관한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모든 실체대상(實 體對象)에 갖추어진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에 있어서, 그 대상의 중심이 그의 주체에 있으므로, 주체와 대상의 합성체(合性體)의 중심도 역시 그 주체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체의 궁극적인 중심이 하나님이시므로, 그 합성체의 궁극적인 중심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3대상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그것들의 3중심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되어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완성할 때 비로소 사위기대(四位基臺)가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위기대의 궁극적인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이 사위기대를 완성한 각개 피조물을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한다. 그런데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개성진리체는 형상적 개성진리체(인간)와 상징적 개성진리체(인간 이외의 피조물)로 대별된다. 그리고 피조세계는 무수한 개성진리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저급한 것으로부터 고급한 것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연결되어있으며, 그 중 인간은 그 최고급의 개성진리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성진리체는 모두 구형운동을 하고 있는데, 저급한 개성진리체는 보다 고급한 개성진리체의 대상이 되므로, 이 대상의 구형운동의 중심은 보다 고급위(高級位)에서 그의 주체가 되어있는 개성진리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수많은 상징적 개성진리체의 중심들은 저급한 것으로부터 고급한 것에로 연결되어 올라가, 그 최종적인 중심은 형상적 개성진리체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상고(詳考)해보자. 오늘의 과학은 물질의 최소단위를 소립자로 보고 있는데, 소립자(素粒子)는 에너지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물질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 단계의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들의 존재목적을 차원적으로 살펴보면, 에너지는 소립자의 형성을 위하여, 소립자는 원자(原子)의 구성을위하여, 원자는 분자(分子)의 구성을 위하여, 분자는 물질의 형성을 위하여, 모든 물질은 우주 삼라만상의 개체들을 구성하기 위하여 각각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의 운동의 목적은 소립자에, 소립자의 목적은 원자에, 원자의 목적은 분자에, 분자의 목적은 물질에, 모든 물질의 목적은 우주형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주(宇宙)는 무엇을 위하여 있으며 그의 중심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인간에게 피조세계를 주관하라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28). 만일 피조세계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피조세계는 마치 보아 줄 사람이 없는 박물관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의 모든 진열품들은 그것들을 감상하고 사랑하며 기뻐해 줄 수 있는 인간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역사적인 유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인연적인 관계가 그것들 사이에 성립되어, 각각 그 존재의 가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만일 거기에 그 중심되는 인간이 없다면 그것들이 무슨 존재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을 위주로 한 피조세계의 경우도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인 간이 있어 가지고 피조물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의 근본과 그 성격을 밝히고 분류함으로써 비로소 그것들이 상호간에 합목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나아가서는 인간이 있어야만 동식물이나 수륙만상(水陸萬象)이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성좌(星座)들의 정체가 구분되어 그것들이 인간을 중심하고 합목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질은 인간의 육체에 흡수되어 그의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하게 하는 요소가 되며, 삼라만상은 인간의 안락한 생활환경을 만들어 주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피조세계에 대한 형상적인 중심으로서의 관계이지만, 이밖에 또 성상적인 중심으로서의 관계가 있다. 전자를 육적인 관계라고 하면, 후자는 정신적 또는 영적인 관계인 것이다. 물질로 형성된 인간의 생리적 기능이 마음의 지 정 의에 완전히 공명되는것은, 물질도 역시 지()- ()- ()에 공명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물질의 성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은 각각 그 정도의 차는 있으나, 모두 정 지 의의 감응체인 것이다. 우리가 자연계의 미()에 도취하여 그와의 혼연일체의 신비경(神秘境)을 체험하게 되는것은, 인간은 피조물의 이러한 성상의 중심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피조세계의 중심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합성일체화한 자리가 바로 천주의 중심이 되는 자리인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면에서 인간이 천주의 중심이 되는 것을 논하여 보자. 상세한 것은 제 6절에서 논하겠지만, 무형 유형 두 세계를 총칭하여 천주라고 하는데, 인간은 이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위에서논한 바에 의하여, 천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피조물은 주체와 대상의 두 가지로 양별(兩別)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시조로 창조되었던 아담이 완성되었더라면 그는 피조물(被造物)의 모든 존재가 갖추고 있는 주체들을 총합한 실체상이 된고, 해와가 완성되었더면 그는 또 피조물의 모든 존재가 갖추고 있는 대상들을 총합한실체상이 되었으리라는 결론을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리고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주관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가 다 함께 성장하여서, 아담은 피조물의 모든 주관주(主管主)로서 완성되고, 또 해와는 모든 대상의 주관주로서 완성되어 그들이 부부를 이루어 일체가 되었더라면, 그것이 바로 주체와 대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온 피조세계를 주관하는 중심체였을 것이다.

또 인간은 천주의 화동(和同)의 중심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의 이성성상의 실체적인 중심체인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부부를 이루어 가지고 그들이 서로 화동하여 일체를 이룰 때, 비로소 이성성상으로 창조된 온 천주도 화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 담과 해와가 완성된 부부로서 일체를 이룬 그 자리가 바로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미()의 대상인 인간이 일체화하여 창조목적을 완성한 선()의 중심이 되는 자리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부모되신 하나님은 자녀로 완성된 인간에게 임재하시어 영원히 안식하시게 된다. 이 때의 이 중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므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원히 자극적인 기쁨을 느끼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실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가 바로 진리의 중심이 되어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목적을 지향하도록 이끌어 주는 본심의 중심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세계는 이와 같이 인간이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부부를 이룸으로써 이루어진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중심하고 합목적적인 구형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피조세계(被造世界)는 인간이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이 중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만물도 탄식하면서 하늘의 뭇 아들들 즉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한 인간들이 나타나서 그의 중심이 되어줄 날을 고대한다고하였다 (로마서 819 - 22).

Ⅳ. 하나님의 편재성


위 에서 우리는,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삼대상목적을 완성한 사위기대는 하나님을 중심한 구형운동을 일으키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모든 존재의, 그리고 그 존재를 위한 모든 힘의 근본적인 기대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의 실체로 되어 있는 피조물의 모든 개성체가 다 이와 같이 구형운동을 일으키어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근본적인 기대를 조성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되어 하나님은 일체의 피조물 가운데 편재하시게 되는 것이다.


Ⅴ. 생리체의 번식


생 리체가 존속하기 위하여는 번식해야 하며, 그 번식은 수수 작용에 의한 정분합작용으로 인하여 되어진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식물은 꽃씨로부터 꽃의 수술과 암술이 생기고, 그 수술과 암술의 수수작용으로 인하여 다시 많은 씨를 맺어서 번식한다. 동물에 있어서는 그 수컷과 암컷이 성장하여 서로 수수작용을 하면 새끼를 낳아 번식하게 된다. 그리고 동식물의 모든 세포분열도 수수작용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목적을 세워 놓고 마음이 원하는대로 몸이 실천하여 몸과 마음이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동지가 생기고, 동지들이 서로 잘 주고 잘 받으면 더 많은 동지를 번식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면에서 보면, 피조세계는 무형의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이 그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그것이 실체적으로 전개되어 번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Ⅵ. 모든 존재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이유


무 엇이든지 존재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어떠한 힘을 요하게 되는데, 그 힘은 수수작용에 의하여서만 생긴다. 그런데 무엇이나 단독적으로는 주고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존재하기 위한 힘을 일으키기 위하여는 반드시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주체와 대상이 이성성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 리고 직선상의 운동에는 어느 때고 끝이 올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직선운동을 하고 있는 존재는 영원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영원성을 가지기 위하여는 돌지 않으면 안 되고, 돌기 위하여는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영원성을 가지기 위하여 이성성상으로 계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대상인 피조물도 영원성을 가지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닮아서 이성성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도 주기적인 윤회에 의하여 영원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3 절 창 조 목 적


Ⅰ.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


피 조물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창세기 14 - 31),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신 피조물이 선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피조물이 선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피 조물이 어떻게 되어야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은 만물세계를 창조하신 후, 끝으로 자기의 성상과 형상대로 희노애락의 감성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시어 그를 보시고 즐기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창조하시고 나서, 생육하고 번식하여 만물세계를 주관하라(창세기 128)고 하신 3대 축복의 말씀에 따라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이루고 기뻐할 때에,하나님도 그것을 보시고 가장 기뻐하실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3대 축복은 어떻게 하여야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창조의 근본 기대인 사위기대가 이루어진 터전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완성하고, 3대 축복의 말씀을 이루어 천국을 이룩함으로써 선의 목적을 완성한 것을 보시고 기쁨을 누리시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45


그러므로 인간을 중심한 피조세계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려 드리는 데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이중목적을 지닌 연체인 것이다. 위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모든 존재의 중심에는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 중심이 지향하는 목적에도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어서, 그것들의 관계는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성 상적인 목적은 전체를 위한 것이고, 형상적인 목적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어서 전자와 후자는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목적을 떠나서 개체적인 목적이 있을 수 없고, 개체적인목적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적인 목적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삼라만상의 피조물은 이러한 이중 목적에 의하여 얽혀 있는 하나의 굉대한 유기체인 것이다.


Ⅱ.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관한 문제를 더 상세히 알기 위하여는,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을 때에 기쁨이 생기느냐 하는 문제를 먼저 알아야 한다. 기쁨은 독자적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무형이거나 실체거나, 자기의 성상과 형상대로 전개된 대상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작 가의 기쁨은 그가 가지고 있는 구상 자체가 대상이 되든가 혹은 그 구상이 그림이나 조각 등의 작품으로 실체화하여 대상이 되었을 때, 그 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낌으로써 비로소 생기게 된다. 이에 구상 자체가 대상으로 서게 될 때에는 그로부터 오는 자극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로 인한 기쁨도 실체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성품은 모두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그의 실체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기쁨을 누리시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위기대의 터전 위에서 3대 축복에 의한 천국이 이루어지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쁨을 느끼실 수 있는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되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되는가 하는 것을 알아 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제 1축복은 개성을 완성하는데 있다.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려면,하나님의 이성성상의 대상으로 분립된 마음과 몸이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그 자체에서 하나님을 중심한 개체적인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하 나님을 중심하고 마음과 몸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룬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고린도전서 316) 그와 일체를 이루기 때문에(요한복음 1420), 신성을 가지게 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그의 뜻을 알고 그대로 생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한 그 마음의 실체대상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된다. 이에 그 마음이나 하나님은 이러한 실체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제 1 축복을 이루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의 희노애락을 곧 그 자체의 것으로서 느끼게 되어 하나님이 서러워하시는 범죄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타락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제 2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각각 개성을 완성한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아담과 해와가 부부가 되어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적인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룬 가정이나 사회는 개성을 완성한 사람 하나의 모양을 닮게 되므로, 이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인간의 실체대상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이나 사회로부터 그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어 기쁨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제 2 축복을 이루면 그것도 또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제 3 축복을 이루게 되면 그것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 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는 먼저 성상과 형상으로 본 인간과 만물세계와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 앞으로 창조하시게 될 인간의 성상과 형상을 형상적으로 전개하여 만물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하등동물에서부터 점차적으로 기능이 복잡한 고등동물들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최고급의 기능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동물의 구조와 요소와 소성도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인 간이 어떠한 동물의 소리도 다 낼 수 있다는 것은 곧 어떠한 동물의 발성기의 성능도 다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피조물의 형과 선의 아름다움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화가는 인간의 나체를 모델로 하여 화법을 연마하는 것이다. 인간과 식물을 놓고 보더라도 그 구조와 기능에는 차이가 있으나 모두 세포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식물의 구조와 요소와 그의 소성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즉 식물의 잎은 그 모양이나 기능으로 보아 인간의 폐에 해당된다. 잎이 대기 중에서 탄산가스를 흡수하는 것 같이 폐는 산소를 흡수한다. 식물의 줄기와 가지는 인간의 심장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영양소를 전체에 공급한다. 그리고 식물의 뿌리는 인간의 위장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영양소를 섭취한다. 더 나아가 식물의 사관과 도관의 형태와 기능은 인간의 동맥과 정맥에 해당되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물과 흙과 공기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광물질의 요소도 가지고 있다. 지구도 인체구조의 표시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지 구에는 식물로 덮인 지각이 있고, 지층 속에는 지하천이 있으며, 그 밑에 암층으로 둘러싸인 용암층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솜털로 덮인 피부가 있고, 근육 속에는 혈관이 있으며 그 밑에 골격과 골격으로 둘러싸인 골수가 있는 인체의구성과 흡사하다.


하 나님의 제 3 축복은 만물세계에 대한 인간의 주관성 완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형상적 실체대상인 인간과 그의 상징적 실체대상인 피조세계가 사랑과 미를 주고 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주관적인 4위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본장 제 5절 Ⅱ.3 참조).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만물세계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성상과 형상을 실체로 전개해 놓은 그 대상이다. 그러므로 하 나님을 중심한 인간은 그의 실체대상인 만물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위와 같이 인간과 만물세계가 합성일체화하여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된 피조세계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체의 본성상과 본형상에 대한 자극적인 감성을 상대적으로 느끼심으로써 기쁨을 누리시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듯 하나님의 제3축복을 이루면, 그것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또 하나의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 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졌다면 죄의 그림자조차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한 이상세계가 지상에 이루어졌을 것이니, 이러한 세계를 말하여 우리는 지상천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차후에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원래 인간은 지상천국에서 생활을 하다가 육신을 벗으면, 그와 동시에 영계에 가서 자동적으로 천상천국의 생활을 하도록 창조된 것이었다.


위에서 설명한 바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천국은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대로 개성을 완성한 인간 하나의 모양을 닮은 세계를 말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 마음의 명령이 중추신경을 통하여 그의 사지백체에 전달됨으로써 그 인체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이, 천국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인류의 참부모를 통하여 모든 자녀들에게 전달됨으로써 모두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4 절 창조본연의 가치


Ⅰ. 창조본연의 가치의 결정과 그 가치의 기준 50


창조본연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어떤 대상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그 대상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인간 주체의 욕구와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 왔던 일반적인 가치관이었다. 그 런데 어떤 개성체의 창조본연의 가치는 그 자체 내에 절대적인 것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성체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하고 어떠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인간주체의 창조본연의 가치추구욕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결정된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창조본연의 가치를 가지기 위하여는, 그것이 인간 주체와 수수작용에 의하여 합성일체화 함으로써 하나님의 제 3 대상이 되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 러면 창조본연의 가치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창조본연의 가치는 어떤 대상과 인간 주체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룰 때 결정되는데, 이 사위기대의 중심이 절대자 하나님이시므로 이 가치의 기준도 절대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자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그에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어떠 대상의 창조본연의 가치도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예 를 들면,꽃의 미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 꽃을 창조하신 목적과 인간의 미에 대한 창조본연의 추구욕이 합치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에 입각한 인간의 미에 대한 추구욕이 그 꽃으로부터 오는 정적인 자극으로 말미암아 충족되어 인간이 완전한 기쁨을 느낄 때 그 창조본연의 미가 결정된다. 이와 같이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그 꽃으로부터 느끼는 기쁨이 완전할 때 그 꽃의 미는 절대적이다. 여기에 그 미의 추구욕이란 인간 자신이 그의 성상과 형상을 그의 대상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느끼려 하는 욕망을 말한다. 그리고 그 꽃의 창조목적과 그 꽃을 대하는 인간의 가치 추구욕이 합치되는 순간 그 대상과 주체는 혼연일체의 상태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가 창조본연의 가치를 가지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그와 그를 대하는 인간주체가 혼연일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되어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절 대적인 가치의 기준인 하나님과 상대적으로 결정된 만물들의 창조본연의 가치도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대상의 가치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상대적이었던 것은, 그 대상과 그것을 대하는 타락인간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수수관계가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 아니고 사탄적인 목적과 욕망을 중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Ⅱ. 창조본연의 지 정 의와 창조본연의 진 미 선 50


인 간의 마음은 그 작용에 있어서 지 정 의 의 세 기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은 그 마음의 명령에 감응되어 행동한다. 이것을 보면 그 육신은 마음 곧 지 정 의 의 감응체로서, 그의 행동은 진 미 선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마음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지 정 의 의 주체이시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본연의 가치실현욕에 의해 마음으로 하나님의 그 본연의지 정 의에 감응하고, 몸으로 이것을 행동함으로써, 비로소 그 행동은 창조본연의 미 진 선의 가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Ⅲ. 사랑과 미, 선과 악, 의와 불의


1. 사랑과 미


하 나님으로부터 분립된 2성의 실체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사위기대를 이루려 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제 3 대상으로 합성일체화하기 위하여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인 힘을 사랑이라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정적인 힘을 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힘은 동적이요미의 자극은 정적이다.52


하 나님과 인간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이시요 인간은 미의 대상이며, 남녀를 놓고 볼때에는 남자는 사랑의 주체가 되고 여자는 미의 대상이 된다. 피조세계에 있어서는 인간은 사랑의 주체가 되고 만믈세계는 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이 합성일체화하면 미에도 사랑이, 사랑에도 미가 내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체와 대상이 서로 돌아서 일체를 이루면 주체도 대상의 입장에, 대상도 주체의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에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윗사람의 사랑에 대하여 아랫사람이 돌리는 미를 충이라고 하고, 부모의 사랑에 대하여 자녀가 돌리는 미를 효라고 하며, 남편의 사랑에 대하여 아내가 돌리는 미를 열이라고 한다. 사랑과 미의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실체로 분립된 양성이 사랑과 미를 주고받음으로 합성일체화하여 하나님의 제 3 대상이 됨으로써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창조목적을 이루려는데 있다.


다 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을 중심하고 그의 이성성상의 실체대상으로 완성된 아담과 해와가 일체를 이루어 자녀를 번식함으로써 부모의 사랑(1 대상의 사랑), 부부의 사랑(2 대상의 사랑), 자녀의 사랑(3 대상의 사랑) 등 창조본연의 3 대상의 사랑을 체휼해야만, 삼대상목적을 완성하여 사위기대를 이룬 존재들로서 인간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위기대의 3대상 사랑에있어서 그 주체적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3대상의 사랑으로 나타나 사위기대 조성을 위한 근본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4위기대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아서 그를 체휼할 수 있는 완전한 미의 대상이요, 또 완전한 기쁨의 대상이기 때문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선의 근본적인 기대가 된다.


2. 선 과 악


주 체와 대상이 사랑과 미를 잘 주고 잘 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제 3 대상이 되어 사 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을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선이라 하고,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배치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악이라고 한다.


예 를 들면, 하나님을 중심하고 마음과 몸이 주체와 대상의 자리에서 사랑과 미를 잘 주고 잘 받아 합성일체화하여 개인적인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한 개성체가 되어 하나님의 제 1 축복을 완성하게 될 때, 그 개성체나 또는 그러한 개성체를 이루기 위한 행위를 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하고 아담과 해와가 주체와 대상의 입장에서 사랑과 미를 잘 주고 잘 받아 부부를 이루고 자녀를 번식하여 가정적인 사위기대를조성함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한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의 제2축복을 완성하게 될 때, 그 가정이나 또는 그러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행위를 선이라고한다. 또 개성을 완성한 인간이 어떠한 사물을 제2의 자아로서 그 대상의 자리에 세워 놓고 그것과 합성일체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제 3 대상을 이루어 주관적인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제 3 축복을 완성하게 될때, 그 사물이나 또는 그 사물을 이루기 위핸 행위를 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위와 같은 하나님의 3대 축복과 반대되는 목적을 이루는 행위나 또는 그 행위의 결과를 악이라고한다.


3. 의와 불의


선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선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의라고 하며, (사탄)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악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불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필연적으로 의의 생활을 요하게 되는 것으로서, 의가 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5 절 피조세계의 창조과정과 그의 성장기간


Ⅰ. 피조세계의 창조과정


창 세기 1장을 보면, 천지창조는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데서 빛을 창조하신 것으로 출발하여, 먼저 물을 궁창 위와 아래로 갈라 세우고, 다음에는 육지와 바다를 가르고, 다음엔 식물을 비롯하여 어류, 조류, 포유류, 인류 등을 창조하시는데 6일이라는 기간이 소요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피조세계의 창조가 끝날 때까지 6일이라는 시간적인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에 기록된 창조의 과정이 오늘날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우주의 생성과정과 거의 일치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 학자들의 문헌에 의하면, 우주는 처음에는 가스상태로서 무수시대의 혼란과 공허한 가운데서 천체를 이루어, 비에의한 유수시대가 되면서 물로된 궁창을 형성하였고, 다음에는 화산의 분출에 의하여 물 속에서 육지가 들어나 바다와 육지가 생겼으며, 다음에는 하등의 식물과 동물에서 시작되어 순차로 어류, 조류, 포유류, 인류가 생성되었다고 하며, 지구의 연령을 수십억년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 기록된 이 성경의 천지창조과정이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연구한 것과 거의 부합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우리는 이 기록이 하나님의 계시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우 리는 여기에서 우주는 시간성을 떠나서 돌연히 생성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성될 때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천지창조를 완료하기까지의 6일이란 기실 일출 일몰의 회수로 계산되는 6일이 아니라, 창조과정의 여섯단계의 기간을 표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Ⅱ. 피조물의 성장기간


피조세계의 창조가 끝날 때까지 6일 즉 여섯 단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은, 곧 피조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 개성체가 완성되는데 있어서도 어느만큼의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의미 한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 있는 천지창조에 관한 기록을 보면 하루 하루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그 서수 일자를 밝힌 것이 있는데, 이 일자 표시에도 우리는 피조물의 완성에 어떠한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알게 된다. 즉 하나님은 첫날의 창조를 마치시자 [저녁이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니라](창세기 15)고 말씀하셨다. 저녁으로부터 밤을 지나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둘째날일 것인데 첫째날이라고 한것은, 피조물이 밤이라는 성장기간을 지나 아침이 되어서 완성된 후에야창조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첫 출발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반드시 어느만큼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인 바, 이것은 피조물이 창조될 때 일정한 성장기간을 거쳐서 완성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56


1. 성장기간의 질서적 3단계


피 조세계는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이 수리적인 원칙에 의하여 실체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수리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면서 상대적인 이성성상의 중화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3수적인 존재이시다. 따라서 한 하나님을 닮아 난 피조물은(창세기 127) 그 존재 양상이나 그 운동이나 또는 그 성장기간 등이 모두 3수과정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사위기대는 하나님, 아담과 해와, 그리고 자녀 번식의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야 완성된다. 그리고 4위기대를 조성하여 원형운동을 하려면 반드시 정분합 3단계의 작용을 하여 삼대상목적을 이루고 3점을 통과해야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물체가 정착하려면 최소한 3점에서 지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이 완성됨에 있어서도 소생기, 장성기, 완성기의 질서적 3단계의 성장기간을 거쳐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그 러면 이제 자연계에서 3수로 나타나고 있는 그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자연계는 광물과 식물과 동물로 되어 있고, 물질은 기체와 액체와 고체의 3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식물은 뿌리와 줄기와 잎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고, 동물은 머리와 몸과 사지의 세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또 성서에 보여지는 3수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인간은 성장기간의 3단계를 완성하지 못하고 타락됨으로써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목적을 다시 이루는데 있어서도 이 3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 러므로 복귀섭리는 3수를 찾는 섭리를 하셨고, 따라서 성서에는 3수를 중심한 섭리의 기록이 많이 있다. 성부 성자 성신의 3, 낙원의 3, 누시엘 가브리엘 미가엘의 3천사, 방주의 3, 노아홍수 때의 3차의 비둘기, 아브라함의 3제물, 이삭 헌제의 3, 모세 때의 어둠의 재앙 3일간, 출애급노정을 위한 3일간의 사탄 분립기간과 가나안복귀를 위한 3차의 40년 기간, 요단강을 건너기 전 여호수아를 중심한 사탄분립의 3일 기간, 예수님의 30년 사생애와 3년 공생애, 3인의 동방박사, 그들의 3예물, 3 제자, 3대 시험, 겟세마네의 3 차례의 기도와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3차의 부인,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의 세 시간의 어둠과 3일 만의 부활 등 그 예는 허다하다.


그러면 인간시조는 언제 타락되었는가? 그들은 성장기간 즉 미완성기에서타락했던 것이다. 인 간이 만일 완성된 후에 타락하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선의 완성체가 되어가지고 타락하였다면 선 자체도 불완전한 것이 되는 것이요, 따라서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도 역시 불완전한 분이시라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창세기 2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말씀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죽을 수도 있었고, 혹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아직 미완성기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만물세계가 6일이라는 기간을 지나서 완성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도 역시 그러한 원리를 떠나서 창조되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성장기간의 어느 단계에서 타락되었던가? 그것은 장성기의 완성급에서 타락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 시조의 타락을 전후한 제반 사정과 복귀섭리역사의 경위가 실증하는 바로서, 본서의 전후편을 두루 연구하는데서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2. 간접 주관권


피조물이 성장기에 있을 때에는 원리 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하여 성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원리의 주관자로 계시면서 피조물이 원리에 의하여 성장하는 결과만을 보아서 간접적인 주관을 하시므로, 이 기간을 하나님의 간접주관권 또는 원리결과주관권이라고 한다.


만믈은 원리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하여 성장기간(간접주관권)을 경과함으로써 완성한다. 그러나 인간은 원리자체의 주관성이나 자율성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면서 이 기간을 경과하여 완성하도록 창조되었다. 즉 먹 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보면, 인간시조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어 따먹지 않고 완성되는 것이나 그 말씀을 불신하여 따먹고 타락되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따 라서 인간의 완성 여부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만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책임수행 여하에 따라서 결정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창조주로서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면서 이 성장기간(간접주관권)을 다 경과함으로서 완성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책임분담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간섭하셔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 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서만 완성되도록 창조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성까지도 닮게 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에 가담케 하심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주관하시듯이, 인간도 창조주의 입장에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주인의 권한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창세기 128). 인간이 만믈과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와 같이 인간이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 받음으로써 천사를 비롯한 만물에 대한 주관성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완성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간접주관권을 두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되어 이러한 주관성을 갖지 못하게 된 인간들도 역시 복귀원리에 의하여 인간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사탄을 비롯하여 만물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하기 위한 그 간접주관권을 다 통과하지 않으면 창조목적을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그처럼 오랜 기간을 두고 연장되어 나온 것은, 복귀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들이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그 자신들의 책임분담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항상 실수를 거듭하여 왔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은사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인 믿음을 세우지 않으면 그를 찾아온 구원섭리는 무위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부활의 혜택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이었고, 그것을 믿고 안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인 것이다 (요한복음 316, 에베소서 28, 로마서 51).


3. 직접주관권


직 접주관권이란 어떠한 것이며 또 이것을 두고 창조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어떠한 주체와 대상이 합성일체화하여 4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루어 가지고, 주체의 뜻대로 사랑과 미를 완전히 주고 받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직접주관이라고 한다. 따라서 직접주관권은 곧 완성권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직접주관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이것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 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주관권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아담 해와가 완성되어 가지고 합성일체화하여 가정적인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이루어, 하나님을 중심한 아담의 뜻대로 서로 사랑과 미를 완전히 주고 받는 선의 생활을 하게 될때, 이것을 하나님의 직접주관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고 그의 뜻을 완전히 알고 실천하게 되므로, 마치 두뇌가 명령 아닌 명령으로 온 몸을 움직이는 것 같이, 인간도 하나님의 명령 아닌 명령에 의하여 그의 뜻대로 움직여서 창조목적을 이루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만물세계에 대한 인간의 직접주관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 나님을 중심하고 완성한 인간이 만물세계를 대상으로 세워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일체를 이루어서, 하나님을 중심한 인간의 뜻대로 인간과 만믈세계가 사랑과미를 완전히 주고 받음으로써 선의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을 만물에 대한 인간의 직접주관이라고 한다.


6 절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Ⅰ.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피 조세계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인간을 본으로 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마음과 몸으로 된 인간의 기본형을 닮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본장 제 1 절 Ⅱ 참조). 그러므로 피조세계에는 인간의 몸과 같은 유형실체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마음과 같은 무형실체세계가 또 있다. 이 것을 무형실체세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리적인 오관으로는 그것을 감각할 수 없고 영적 오관으로만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체험에 의하면, 이 무형세계는 영적인 오관에 의하여 유형세계와 꼭 같이 실감할 수 있는 실재세계인 바, 이 유형 무형의 두 실체세계를 합친 것을 우리는 천주라고 부른다.


마음과의 관계가 없이는 몸의 행동이 있을 수 없는 것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는 창조본연의 인간의 행동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무형세계와의 관계가 없이는 유형세계가 창조본연의 가치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그 러므로 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인생의 근본 의의를 알 수 없으며, 무형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는, 유형세계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형세계는 주체의 세계요 유형세계는 대상의세계로서, 후자는 전자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히브리서 85). 유형세계에서 생활하던 인간이 육신을 벗으면 그 영인체는 바로 무형세계에 가서 영주하게 된다. 63


Ⅱ.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세계의 주관자로 창조하셨다(창세기 128). 피조세계는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감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하나님은 이 세계를 직접 주관하지 않으시고, 이 세계에 대한 감성을 갖춘 인간을 창조하시어 그로 하여금 피조세계를 직접 주관하도록 하신 것이다.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유형세계를 느껴 그것을 주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것과 같은 요소인 물과 흙과 공기로 육신을 창조하시고 무형세계를 느껴 그것을 주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것과 같은 영적인 요소로써 영인체를 창조하시었다. 변화산상에서 예수님 앞에 이미 1,600여년 전에 죽었던 모세와 900여년 전에 죽었던 엘리야가 나타났었는데(마태복음 173), 이것들은 모두 그들의 영인체들이었다. 이와 같이 유형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육신과 무형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영인체로 구성된 인간은 유형세계와 무형세계를 모두 주관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세계의 매개체요 또한 화동의 중심체로 창조하셨다. 인 간의 육신과 영인체가 수수작용에 의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될 때, 유형 무형 두 세계도 또한 그 인간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일으키어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대상세계가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두 세계의 매개체요 또한 화동의 중심체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치 두 음차를 공명시키는데 있어서의 공기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또 이와 같이 무형세계(영계)와 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마치 라디오나 텔레비젼과도 같아서 영계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게 되어 있다.


세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으로 창조하셨다. 하 나님은 나중에 창조하실 인간의 성상과 형상을 실체적으로 전개하시어 먼저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었다. 따라서 영인체의 성상과 형상의 실체적인 전개로서 무형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영인체는 무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요, 한편 또 육신의 성상과 형상의 실체적인 전개로서 유형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육신은 유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니, 흔히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64


그런데 인 간이 타락되어 피조세계는 자기를 주관해 줄 수 있는 주인을 잃어버렸으므로, 로마서 819절에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복귀된 창조본연의 인간)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화동의 중심체인 인간이 타락되어 유형 무형 두 세계의 수수작용이 끊어짐으로써 그것들이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분리되었기 때문에, 로마서 822절에는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인체와 육신을 가진 완성한 아담으로 오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그는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셨다고 말씀하셨다(고린도 전서 1527). 예수님은 타락인간이 그를 믿어 그와 일체가 됨으로써 그와 같이 완성한 인간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구주이신 것이다.


Ⅲ. 육신과 영인체와의 상대적 관계


1. 육신의 구성과 그의 기능


육신은 육심(주체)과 육체(대상)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 육 심은 육체로 하여금 그 생존과 번식과 보호 등을 위한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작용부분을 말한다. 그러므로 동물에 있어서의 본능성은 바로 그들의 육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육신이 원만히 성장하려면 양성의 영양소인 무형의 공기와 광선을 흡수하고 음성의 영양소인 유형의 물질을 만물로부터 섭취하여, 이것들이 혈액을 중심하고 완전한 수수작용을 해야한다.


육신이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함에 따라서 영인체 역시 선화 혹은 악화한다. 이것은 육신으로부터 영인체에게 어따한 요소를 돌려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육신으로부터 영인체에 주어지는 요소를 우리는 생력요소라고 한다. 우 리는 평소의 생활에 있어서 육신이 선한 행동을 할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행동을 할 때는 마음이 언짢은 것을 경험 하거니와, 이것은 그 육신의 행동의 선악에 따라 그에 적응하여 생기는 생력요소가 그대로 영인체에 돌아가는 증좌이다.


2. 영인체의 구성과 그의 기능


영 인체는 인간의 육신의 주체로 창조된 것으로서 영감으로만 감득되며,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고, 또 천사나 무형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무형실체로서의 실존체인 것이다. 영인체는 그의 육신과 동일한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육신을 벗은 후에는 무형세계(영계)에 가서 영원히 생존한다. 인간이 영존하기를 염원하는 것은 그 자체 내에 이와 같이 영존성을 지닌 영인체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인체는 생심(주체)과 영체(대상)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생 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인체의 중심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영인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소(양성)와 육신으로부터 오는 생력요소(음성)의 두 요소가 수수작용을 하는 가운데서 성장한다. 그리고 영인체는 육신으로부터 생력요소를 받는 반면에 그가 육신에게 돌려보내는 요소도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것을 생령요소라고 한다. 인간이 신령에 접함으로써 무한한 기쁨과 새로운 힘을 얻어서 고질이 물러가는 등 그 육신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은 그 육신이 영인체로부터 생령요소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성장한다. 그러므로 영인체와 육신과의 관계는 마치 열매와 나무와의 관계와 같다. 생 심의 요구대로 육심이 호응하여 생심이 지향하는 목적을 따라 육신이 움직이게 되면 육신은 영인체로부터 생령요소를 받아 선하게 되고, 그에 따라 육신은 좋은 생력요소를 영인체에 다시 돌려 줄 수 있게 되어, 영인체는 선을 위한 정상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심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진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리로 생심이 요구하는 것을 깨달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인간 책임분담을 완수해야만 생령요소와 생력요소가 서로 선의 목적을 위한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그 런데 생령요소와 생력요소는 각각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악인에 있어서도 그의 본심이 선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그 생령요소가 항상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선한 생활을 하지 않는 한 그 요소도 육신을 선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생력요소와의 사이에 있어 올바른 수수작용을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인체는 어디까지나 지상의 육신생활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 생심을 중심하고 창조원리에 의한 질서적 3기간을 거쳐서 성장하여 완성하게 되는데, 소생기의 영인체를 영형체라 하고, 장성기의 영인체를 생명체라 하며, 완성기의 영인체를 생령체라고 한다.67


하나님을 중심하고 영인체와 육신이 완전한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사위기대를 완성하면,그 영인체는 생령체가 되는데, 이러한 영인체는 무형세계의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영인체에 느껴지는 모든 영적인 사실들은 그대로 육신에 공명되어 생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영적인 사실들을 육신의 오관으로 느껴서 알게 된다. 생령체를 이룬 인간들이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다가 육신을 벗고 영인으로서 가서 사는 곳이 천상천국이다. 그러므로 지상천국이 먼저 이루어진 후에야 천상천국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영인체의 모든 감성도 육신생활 중 육신과의 상대적인 관계에 의하여 육성되는 것이므로, 인간은 지상에서 완성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체휼해야만 그 영인체도 육신을 벗은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체휼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영인체의 모든 소성은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에 형성되기 때문에 타락인간에 있어서 영인체가 악하게 되는 것은 육신생활의 범죄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 영인체가 선화도 또한 육신생활의 속죄로 인하여서만 이루어진다. 죄악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육신을 쓰고 지상에 오셔야 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 리는 지상에서 선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섭리의 제1차적인 목적이 지상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문의 열쇠를 지상의 베드로에게 주셨고(마태복음 1619), 땅에서매고 푸는대로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린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1818).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인체가 그 곳에 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인체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인 간은 원래 완성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호흡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긴 허물로 말미암아 이 사랑을 완전히 호흡할 수 없게 된 영인체는 완전한 사랑의 주체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도리어 고통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영인체는 하나님의 사랑과 먼 거리에 있는 지옥을 자진하여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생장할 수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인체의 번식은 어디까지나 육신 생활에 의한 육신의 번식과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3. 생심과 육심과의 관계로 본 인간의 마음


생심 과 육심과의 관계는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같아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하면, 영인체와 육신을 합성일체화하게 하여 창조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하나의 작용체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타락되어 하나님을 모르게 됨에 따라 선의 절대적인 기준도 알지 못하게 되었으나, 위와 같이 창조된 본성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은 항상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니, 이것을 양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을 알지 못하여 양심의 절대적인 기준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선의 기준을 달리 함에 따라서 양심의 기준도 달라지게 되어, 양심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흔히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선을 지향하는 마음의 성상적인 부분을 본심이라하고, 그 형상적인 부분을 양심이라고 한다.


그 러므로 인간이 그 무지에 의하여 창조본연의 것과 그 기준을 달리한 선을 세우게 될 때에도 양심은 그 선을 지향하지만, 본심은 이에 반발하여 양심을 그 본심이 지향하는 곳으로 돌이키도록 작용한다. 사탄의 구애를 당하고 있는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지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작용체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을 우리는 사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심이나 양심은 이 사심에 반발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을 분립하고 하나님을 상대하게 함으로써, 악을 물리치고 선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2장 타 락 론


인 간은 누구나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려는 본심(本心)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어떠한 악의 세력에 몰리어, 본심이 원하는 선을 버리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된다. 이러한 악의 세력 가운데서 인류의 죄악사(罪惡史)는 연면히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이 악의 세력의 주체를 사탄이라고 한다. 인간이 이 사탄의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는 것은, 사탄이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해서 사탄이 되었는가 하는, 그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악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함으로써 인류죄악사를 청산하고 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는, 먼저 사탄이 사탄 된 동기와 경로와 그 결과를 밝히 알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타락론(墮落論)을 알아야 한다.


1절 죄의 뿌리


이 제까지 인간 속에 깊이 그 뿌리를 박고 쉬임 없이 인간을 죄악의 길로 몰아내고 있는 죄의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기독교 신도들만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인간 조상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것이 죄의 뿌리가 된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선악과가 문자 그대로 나무의 과실이라고 믿는 신도들과, 또 성서의 많은 부분이 그러한 것처럼 이것도 그 어떠한 것에 대한 상징이나 비유일 것이라고 믿는 신도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제각기 구구한 해석을 하고 있을 뿐,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완전한 해명이 내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I.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많 은 기독교 신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담과 해와가 따먹고 타락(墮落)되었다는 선악과가 문자 그대로 어떠한 나무의 열매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부모 되시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녀들이 따먹고 타락할 수 있는 과실(果實)을 그렇게도 보기 좋고 탐스럽게 만들어서(3 : 6), 그들이 손쉽게 따먹을 수 있는 곳에 두셨을 것인가?


예 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 : 11)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먹는 것이 어떻게 인간을 타락케 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한편 인간의 원죄(原罪)는 인간의 시조로부터 유전(遺傳)되어 나오고 있는 것인데, 먹는 물건이 어떻게 원죄를 유전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유 전은 오직 혈통(血統)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그 무엇을 먹었다고 하여 그 결과가 후손에게까지 유전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선악과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고 믿고 있는 신도들도 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인간에게 사망이 따르는 방법으로써 그렇게 무자비한 시험을 하셨으리라고는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아 담과 해와는 그들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으면 정녕코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먹으면 죽을 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을 따먹었다. 기아(饑餓)에 허덕였을 리도 없는 아담과 해와가 먹을 것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렇게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어떠한 물질이 아니고 생명에 대한 애착까지도 문제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자극을 주는 다른 무엇이었음에 틀림없다. 즉 선악과가 이와 같이 물질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무엇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성경(聖經)의 많은 중요한 부분이 상징이나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데, 무엇 때문에 선악과만은 굳이 문자대로 믿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은 모름지기 성서의 문자에만 붙들려 있었던 지난날의 고루하고도 관습적인 신앙태도를 버려야 하겠다.


선 악과를 비유로 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비유하였을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해명하는 방법으로서 창세기 29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에덴동산에 있었다고 하는 '생명나무'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생명나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그와 함께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이라는 것도 바로 알 수 있겠기 때문이다.


1. 생명나무


성 서(聖書)의 말씀에 의하면, 타락인간(墮落人間)의 소망은 '생명나무' 앞으로 나아가 '생명나무'를 이루는 데 있다. 즉 잠언 1312절을 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도 '생명나무'를 소망의 대상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이고, 요한계시록 2214절의 기록을 보면,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독교 신도들의 소망도 역시 '생명나무'에 나아가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타락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생명나무'인 것을 보면 타락 전 아담의 소망도 '생명나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복귀과정에 있는 타락 인간은 원래 타락 전 아담이 이루려다가 못 이룬 바로 그 소망을 다시 찾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 세기 324절에, 아담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화염검(火焰劍)으로써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그의 길을 막아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로 보아도 타락 전 아담의 소망이 '생명나무'였다는 이 '생명나무'를 이루지 못하고 에던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3 : 24), '생명나무'는 그 후 한결같이 타락인간의 소망으로 남아져 내려왔던 것이다.


그 러면 완성될 때를 바라보며 성장하고 있던 미완성(未完成)한 아담에 있어서의 소망이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그가 타락되지 않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생명나무'의 내용은 바로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은 곧 완성한 아담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생명나무'는 결국 완성한 아담을 비유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 일 아담이 타락되지 않고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되어서 '생명나무'를 이루었다면, 그의 후손들도 모두 '생명나무'가 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그의 길을 화염검(火焰劍)으로 막아버리고 말았다(3 : 24). 그렇기 때문에 '생명나무'는 창조이상을 복귀하려는 타락인간의 소망으로 남아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죄(原罪)가 있는 타락인간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생명나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이 '생명나무'가 되기 위하여는 로마서 1117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창조이상을 완성한 한 남성이 이 지상에 '생명나무'로 오셔 가지고 모든 인간을 그에게 접붙여서 하나되게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러한 '생명나무'로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312절에 의하면,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고대하였던 '생명나무'는 바로 초림(初臨)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러나 창세기 324절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화염검으로써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아담의 길을 막았기 때문에, 이것이 걷히지 않고는 인간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23절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五旬節) 날에 성도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불같은 혀 곧 화염검이 갈라진 후에야 성령(聖靈)이 강림하여, 전 인류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그에게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러나 기독교 신도들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에게 영적(靈的)으로만 접붙임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또다시 속죄(贖罪)를 받아야 할 죄악의 자식을 낳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나온 원죄를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또 그 자식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전편 제 4장 제 1).


그 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상에 '생명나무'로 재림(再臨)하셔서 온 인류를 다시 접붙이심으로써, 원죄까지 속죄해 주시는 섭리를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4절의 말씀대로, 신약성도(新約聖徒)들이 또 다시 '생명나무'를 고대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요한계시록 2214절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나무'는 바로 재림 예수님을 비유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우 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이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2 : 9)를 요한계시록 2214절의 '생명나무'로서 복귀하시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이 타락(墮落)하여 창세기 29절의 첫 '생명나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타락인간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2214절의 후 '생명나무'로 재림하셔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15 : 45).


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 나님은 아담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배필로서 해와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동산 가운데에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을 비유하는 나무가 있었다면 그러한 여성을 비유하는 또 하나의 나무도 있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생명나무'와 같이 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2 : 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한 그 나무는 실상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완성한 해와를 비유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예수님을 포도나무(15 : 5) 혹은 감람나무(11 : 17)로 비유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타락(墮落)의 비밀을 암시하심에 있어서도 완성한 아담과 해와를 두 나무로 비유하셨던 것이다.


II. 뱀의 정체


해와를 꼬여서 범죄케 한 것은 뱀이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3 : 4∼5). 그러면 또 이 뱀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우리는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내용에 의하여 뱀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하자.


성 경에 기록된 뱀은 인간과 담화(談話)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적인 인간을 타락시킨 것을 보면 그것도 영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뱀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더욱 영물(靈物)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또 요한계시록 129절을 보면, 하늘에서 큰 용()이 땅으로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魔鬼)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옛 뱀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해와를 꼬인 그 뱀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뱀이 하늘로부터 내쫓겼다고 하였으니, 하늘에 있었던 그 옛 뱀이 영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편 이 뱀을 마귀요 사탄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탄은 인간이 타락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상 인간의 마음을 악()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온 것이 사실이니 그것은 영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사탄이 영물인 것이 사실이라면, 사탄으로 표시된 뱀이 영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사실로 보아, 해와를 꼬인 뱀은 동물이 아니고 어떠한 영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러면 이처럼 뱀으로 비유한 영물(靈物)이 과연 창세 전(創世前)부터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것도 피조물(被造物) 중의 하나였던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일 이 뱀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대립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존재라면, 피조세계(被造世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악(善惡)의 투쟁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영속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결국 무위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며, 모든 존재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일원론(一元論)은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뱀으로 비유한 이 영물은 원래 선()을 목적으로 창조되었던 어떠한 존재가 타락되어 사탄이 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과 담화(談話)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또 그 소재(所在)가 하늘이었고, 한편 또 그것이 만일 타락되어 악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심령(心靈)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존재는 과연 무엇일 것인가? 천사(天使) 이외에는 이러한 조건을 구비한 존재가 없으므로 우선 그 뱀은 천사를 비유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24절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를 용서치 아니 하시고 어두운 지옥(地獄)에 던져두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을 꼬여 가지고 범죄하였던 뱀의 정체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입증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뱀 은 혀끝이 둘로 갈라져 있다. 따라서 그것은 한 혀로 두 말을 하고, 한 마음으로 이중의 생활을 하는 자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또 뱀은 자기의 먹을 것을 몸으로 꼬아서 먹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유혹하는 자의 표상이 된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을 꼬인 천사를 뱀으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III.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


우리는 위에서 인간을 꼬여 타락케 한 뱀이 바로 천사였으며, 이 천사가 범죄하여 타락(墮落)됨으로써 사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 다음으로 우리는 천사와 인간이 어떠한 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1. 천사의 범죄


유 다서 16절에서 7절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천사가 간음(姦淫)으로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런데 간음이란 혼자서는 행할 수 없는 범행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행하여진 천사의 간음에 있어 그 대상이 되었던 존재가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인간은 어떠한 죄를 저질렀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2. 인간의 범죄


창 세기 225절을 보면, 범죄하기 전 아담 해와는 몸을 가리지 않은 채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墮落)한 후에는 벗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무화과(無花果)나무 잎으로 하체(下體)를 가리었다.(3 : 7). 만일 선악과(善惡果)라고 하는 어떠한 과실이 있어서 그들이 그것을 따먹고 범죄를 하였다면, 그들은 필시 손이나 입을 가리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은 허물을 가리는 것이 그 본성(本性)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손이나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리었었다. 따라서 이 사실은, 그들의 하체가 허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이 하체로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욥 기 3133∼34절에는 내가 언제 아담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던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담은 타락한 후 그의 하체를 가리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곧 아담이 가리었던 그의 하체가 허물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의 하체가 어찌하여 허물이 되었을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담이 하체로써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인 간이 타락하기 전의 세계에 있어, 뻔히 죽을 줄 알면서 저지를 수도 있었던 행동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식하라(1 : 28)하신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은 사랑으로 인하여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두고 볼 때 사랑은 가장 귀하고 가장 거룩한 것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사랑의 행동을 천시하여 온 것은 그것이 바로 타락의 원인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도 또한 음란(淫亂)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천사와 인간과의 행음


우 리는 위에서 밝힌 바 인간이 천사(天使)의 꼬임에 빠져 타락되었다는 사실과, 인간이나 천사는 모두 행음(行淫)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었다는 사실과, 그 위에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 영적인 존재로서 서로 어떠한 정적(情的)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과 천사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등을 결부하여 볼 때, 인간과 천사와의 사이에 행음관계가 성립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844절에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29절에서는 마귀(魔鬼)는 곧 사탄이요 사탄은 곧 인간을 꼬인 옛 뱀이라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성구(聖句)들로 미루어 보면, 인간은 마귀의 후손이요, 따라서 사탄의 후손이기 때문에 결국 뱀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그 러면 인간은 어떤 경위로 타락한 천사, 즉 사탄의 후손이 되었는가? 이것은 인간의 조상이 천사와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사탄의 혈통(血統)에서 태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혈통이 아니고 사탄의 혈통으로서 태어났기 때문에, 로마서 823절에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친자식이 못되고)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 마태복음 37절에는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 즉 사탄의 자식이라고 질책하였고, 마태복음 2333절에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보시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책망하신 기록이 있다.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중심삼고 볼 때, 우리는 천사와 인간 사이에 행음관계(行淫關係)가 있어서, 그것이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IV. 선악과


우 리는 위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해와를 비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그러면 또 선악과(善惡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해와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목(果木)이 과실에 의하여 번식되는 것과 같이,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한 그의 사랑으로써 선의 자녀를 번식해야 할 것이었는데, 사탄을 중심한 그의 사랑으로써 악의 자녀를 번식하였다. 해와는 이와 같이 그의 사랑으로써 선의 열매도 맺을 수 있고, 또한 악의 열매도 맺을 수 있었던 성장기간(成長期間)을 통하여서 완성되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랑을 선악과라고 하였던 것이며, 그 사람을 말하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 러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그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것은 가지고 자기의 피와 살이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사랑으로 선과(善果)를 따먹고, 선의 피와 살을 받아 선의 혈통을 번식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탄을 중심한 악의 사랑으로 ǹ